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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 인터페이스와 접합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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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 인터페이스와 접합에 대해 

언메이크랩

*이 글은 백남준아트센터 <우리의 밝은 미래 : 사이버네틱 환상>의 전시 도록에 수록된 글입니다. 

자연마저 신화적인 것으로 다루려는 기계의 시대에 사이버네틱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이버네틱스가 인간과 기계를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정보 처리 장치로 동일하게 놓음으로써, 오랜 존재론적 질문 “이것은 무엇인가”를 기능론적 질문 “이것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로 바꿔 놓았다는 것을 주목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인과성을 대신하는 상관성’ 혹은 ‘계산적 자연’ 이라는 현대 정보기술 사회가 제시하는 강렬한 정신이란 바로 사이버네틱스가 마련한 지적 패러다임 속에서 탄생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가 마련한 길이 이것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노버트 위너를 비롯한 학자들이 사이버네틱스라는 학문을 가다듬을 때, 그들이 ‘사이버‘라는 단어가 가진 기원, 즉 항해라는 구체적 행위에 내재한, 수많은 요소들의 끊임없는 조정의 은유를 생명체-기계조직의 피드백 절차로 가져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길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수학적 관점을 넘어 이것이 가졌던 기원적 의미인 ‘세심하게 조절되는 숙련된 통치’ 라는 의미에 또다시 도달한다. 즉 서로를 둘러싸고 있는 개체의 상호작용과 재조정, 그 사이로의 항해라는 의미는 단순히 열역학과 기계 – 인간을 분별하던 관점을 넘어 기술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을 바라볼 수 있는 끊임없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근간을 이루던 사이버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남용되어 항해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사이버네틱스 역시 그 자신에서 탄생한 인공두뇌학의 부상으로 현재는 그다지 주목받지 않는 단어가 되어 버린 동시에 만물 인터넷의 시대, 거의 준 자연을 얘기하는 것에 가까워져 버렸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이 시대의 기술사회적 요소들을 기계론적 관점으로도, 생기론적 관점으로도 오용하지 않으면서 항로의 지속적 탐색과 재조정을 위한 근거로 가져올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사이버네틱스가 기원에 품고 있는 항해라는 은유처럼 우리는 세심하게 조정되는 항로의 궤적을 따라, 지속적으로 기술적 대상들을 배치하고 조절하며 가고 있을까? 혹은 거대한 정치경제적 알력과 기술 숭배적 환각이 그려낸 지도를 앞에 두고 있을까. 그 지도는 마치 앞면에서 뒷면으로 바로 이동하려는 듯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지금의 기술광적 시대의 면모를 더 잘 보여주는 실제적인 지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텅 비어 있는 항해의 지도를 펼치는 것이다. 이 지도는 어떤 방향도 지시하지 않는 지도이다. 우리는 이 텅 빈 지도를 예술에서의 피드백, 자기조절, 자율통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펼쳐 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을 좀 더 예민하게 다루어 보기 위해 이 빈 지도의 어디쯤에서 출발해봐야 할까. 인간과 기계의 피드백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면과 면의 관계의 문제, 즉 인터페이스라는 ‘접합’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가, 어떠한 구조로, 어떤 영향력을 만들며 서로 다른 경계를 ‘접합’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기술발전의 과정 자체이기도 하면서, 현재의 기술 담론 역시 많은 경우 인간-기계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접합시키기 위한 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시도이다.

몇 년간 이 인터페이스를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회자되는 표현이 ‘이음새 없는 변환’ (Seamless Transition)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표정, 손동작, 시선, 몸동작, 목소리들은 ‘인지’되고 수집되어 분석되고 다시 되먹임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매끄러운 접합을 위해 ‘태어난 것’과 ‘만들어 진 것’의 융합이라는 흥미로운 경계를 그으며 새로운 신물질적, 생물적 실험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러나 그 접합의 과정은 기실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부드럽게 잇는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의 구성을 횡단하는, 모든 차이들에 대해 경계를 만들고 그것에 대해 끊임없는 재조정을 요청하는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매번의 기술적 혁명의 시대에 늘 등장하던 파괴적인 전환은(악마의 맷돌에 비유되던) 왜 지금의 시대에는 이음새 없는 변환의 강조로 혹은 ‘스마트’라는 사고의 패러다임으로 이 시기를 드러내고 (혹은 감추고) 있을까.

이러한 ‘이음새 없는 변환’이란 이 시대의 주류적 인터페이스의 명령 안에서 작가들은 자신에게 부드럽게 스며들어 증강되고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들을 붙잡아 흥미로운 위화감을 부여한다. 그것은 표준의 규칙을 따르는 듯 하면서도 슬쩍 미끄러지며 전유하고, 말해지지 않은 관점을 드러내고 관객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피드백 회로 속에 배치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이쪽과 저쪽의 세계를 단순히 부드럽게 연결하는 접면을 설계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문법, 규칙, 다른 정보 체계를 드러내고 되묻는 역할을 한다. 즉 중간 (inter)에서 맞대면 하는 얼굴(Face)이라는 인터페이스의 역할을 다시금 환기하는 ‘간섭 인터페이스(Inteference Interface)’를 드러내는 것이다.

배인숙의 <Sum>은 우리에게 중력과 같이 익숙해진 멀티터치라는 인터페이스를 중심에 두고 작업을 전개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준적 멀티 터치와는 거리가 있다. 좌표 값을 인식하는 1인용 멀티터치에 익숙한 우리에게 10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참여해야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이 기계의 멀티터치는 사실상 전혀 다른 인터페이스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열 손가락을 움직이며 은연 중(혹은 자율적 통제의 상태에서) 의미 있는 손가락의 움직임만을 촉각적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움직임은 의미 있는 합일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 순간 잡음은 줄어들면서 가려져 있던 소리가 드러난다. 멀티 터치라는 인터페이스의 형식을 미끄러지듯 변주한 이 장치는, 지속적으로 노이즈를 제거하며 뚜렷한 메시지의 전달이란 목적으로 발전해온 정보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포착이기도 하다.

다이애나 밴드의 <손에 폰 잡고 : 광장연습>은 관객을 능동적 행위자로 상정한 오픈 네트워크에 초대한다. 그를 위해 디지털 시대에 가장 표준적 인터페이스인 스마트폰과 웹페이지에 익은 관객의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관객은 이 네트워크에서 표준 인터페이스에서와는 다른 자유도를 경험하게 된다. 그를 통해 관객은 이전과는 다른 목적을 서로 동기화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관객은 통제적 네트워크 속에서 개방적인 척 하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이 개방회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프로토룸은 아예 인터페이스 자체를 픽셀이라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원으로 옮겨놓는다. ‘Deep 8K’의 고해상의 시대를 지나며 우리는 현실보다 높은 해상도의 평면을 마주하고 있고, 그에 반해 픽셀은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세계의 ‘원자’가 되어 가라앉고 있다. 메타픽셀 피드백 카메라는 이렇게 점점 보이지 않는 픽셀에 생명력을 부여해 하나하나의 픽셀을 컴퓨터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로 위치시킨다. 하나하나의 픽셀은 각자가 되먹임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며, 이는 새로운 이미지로 합쳐지며 관객에게 시적 연산의 순간을 부여한다.

황주선은 관객이 어떻게 ‘낯설게 하기’를 경험해 스스로 의미를 형성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인간이 자율적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 형성하기’를 할 것이라는 믿음은 관객에 대한 의도적 개입보다는 ‘흔들기’에 가까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렇게 황주선의 작업에서는 현대 인터페이스의 기술이 가진 연결의 동학을 그대로 차용하되, 그것이 기술이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공인화되어 피드백되는 지표에 관객이 스스로 의문과 의미를 형성하도록 놓아둔다. <마음?= 마음!>에서 작가는 현재의 수많은 인식 기술들이 그러하듯 뇌파 측정이라는 미숙한 이음새에 주목한다. 그것의 모호한 피드백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고 간결하게 전달되는 수량화로 인해 ‘과학적’ 신뢰의 순간을 형성한다. 작가는 이러한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범용적 인터페이스로 공인되어 가는 이 ‘기술적 합의’를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질문한다.

언메이크랩은 관객의 개입이라는 환상을 거두고 한 도시의 변환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음새를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로공단과 구로디지털단지’로 대변되는 이중도시는 지리적으로는 한 도시이지만 산업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급격하게 재개발되면서 서로의 역사가 기억되지 못하는 이음새 없는 도시이다. 그러면서도 엇비슷하게 노동의 환경은 계속 반복되고 있는 도시이다. 언메이크랩은 이 도시의 역사와 진실, 루머들을 리서치와 인터뷰를 통해 수집해 이음새가 없는 듯 보이는 두 도시가 어떻게 국가적 프로그래밍에 의해 동일하게 회귀하는 노동 환경을 지속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금물이라는 노동에 대한 은유와 전도성을 동시에 가진 매질(medium)이 스크린을 무작위로 터치하며 소리를 발생시키는 장치로 구현함으로써 언제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국가적 기술정치 선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작가들의 간섭 인터페이스에 대한 접근은 기술미디어 워크숍에서도 다시 한 번 관객이 참여하는 ‘프랙티스’로 시도되었다.

배인숙은 모터와 날개 그리고 그것을 동일한 움직임으로 제어하는 코드의 더미를 참가자에게 공통적으로 준다. 참가자들은 특별한 개입이나 자율성 보다는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제작을 하고 완성된 모터와 날개를 같이 작동 시킨다. 작동하는 장치들은 모든 동일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합일되는 듯 미묘하게 어긋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완전한 제어의 환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프로토룸은 <Meta pixel Camera>의 작동 방식을 개방해 참여자들이 직접 픽셀에게 원하는 알고리즘을 주는 방식으로 픽셀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시도하게 한다. 이 간결하나 익숙하지 않은 소통은 디지털 이미지를 이루는 픽셀 각자에 다른 말 걸기를 참여자에게 요청하고, 참여자들은 이 범용적이지 않은 인터페이스 장치를 통해 컴퓨터와 다른 커뮤니케이션을 방식을 실행해 보게 된다.

다이애나 밴드는 또 다른 네트워크 도구로 와이파이를 선택한다. 디지털 디바이스에 수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와이파이 신호와 이름은 마치 스쳐지나가지만 알 수 없는 타자와 같은 존재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참여자들은 이 와이파이 표식을 개인의 목소리를 전달 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상정하고, 각자의 메시지를 여기에 띄우게 한다. 이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실재하는 주체들이 서로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라는 면에서, 의미 없이 떠도는 와이파이 표식이 드러내지 않던 목소리를 담는다.

언메이크 랩은 기술이 변화시켜 온 역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꾸준히 사용기술과 혁신기술에 대해 질문해왔다. 여기에서도 구 미디어인 라디오의 작동 방식에 주목하며, 기술이란 ‘자연현상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근원적 출발을 다시 짚고자한다. 참가자들은 송신기를 제작하고, 이 송신기가 전달하는 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수신하려고 노력하면서 이제까지 익숙해져 있던 매끈한 수신과 다른 엄청난 잡음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정보통신이라는 것이 ’전파‘라는 자연 현상과 잡음, 송수신의 매커니즘을 어떻게 다루며 기술을 발전시켜 왔는지에 대한 생각을 환기하게 된다.

이와 같이 참여 작가들은 작업과 기술미디어 워크숍은 텅 빈 타자와의 소통의 강조, 혹은 주체를 객체화 시키는 수많은 자기 인식의 기술들과 인터페이스 속에서, 지금의 기술 판타지가 가진 이음새 없는 연결에 대한 추동보다, 그 경계가 무엇인지를, 그 인터페이스 자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간섭을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의식되지는 않고 매끄럽게 침습하는 현대의 인터페이스에 특정한 의식들을 새겨놓는다. 그를 통해 인간과 기계는 다양한 경계의 입장차를 사이에 두고 관계 맺음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기술 시대의 예술이란 활동이 재발명해 낼 수 있는 것임을 얘기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사이버네틱스가 인간과 기계를 모두 피드백이 가능한 자기 조절적 항상성이 있는 장치로 동일하게 놓은 것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개별 개체가 분절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둔 것이다. 그렇게 사이버네틱스는 개인 – 사회 – 지구적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의 피드백 루프를 조정하고 지속적 질문을 만들어 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을 접합과 간섭의 상상위에서 재조정하는 기술적 활동이야 말로 새로운 예술 활동이자 노동 활동, 동시에 권력과 통제 시스템에 의해 구성된 회로를 가로지르는 회복적 활동이기도 하다. 또한 자연현상에 기반을 둔 기술이라는 원래의 시원을 환기하며 생명, 생태, 인공, 정치와 자본의 이해를 지속적으로 재조정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On Interference Interface and Junction

Unmake Lab (Co-curator, Artist)

In this era of machine that even nature is treated as being mythical, what does it mean to talk about cybernetics? Let us note that cybernetics replaced the old ontological question “what is this?” with a functional question “what does this do?” when it placed human and machine at the same location as information processing devices to maintain homeostasis. Then, you can assume that the “correlationship replacing causality” or the “computational nature,” the intense spirit presented by the contemporary information technology society, was born from the intellectual paradigm created by cybernetics. You should note, however, that this was not the only road cybernetics has paved. When scholars such as Norbert Wiener elaborated cybernetics as a field of study, they brought the metaphor of the ceaseless coordination among numerous elements inherent in the concrete action “to steer”—the origin of the word “cyber”—into a process of feedback of organism-machinery. On the path, going beyond the mathematical point of view, cybernetics again reaches the meaning of “skilled rule that is controlled with fineness,” an origin of meaning that the term had. In other words, cybernetics had indicated interaction and re-coordination of entities surrounding each other and steering among them, going beyond thermodynamics and the view that merely distinguished machine from human to try to present an endless way on which you could look into politics, society, culture, and art of technological society. Nowadays the term cyber has used so abusively that its meaning “to steer” is faded, as the original meaning of cybernetics has gone out of the picture due to emergence of artificial intelligence—which was born from it and is also called “cybernetics”— and gets closer to a concept indicating an era of Internet of Everything, or nearly quasi-nature. Nevertheless, the cybernetics still provides a framework that can be used as a foundation for ongoing exploration and re-coordination in steering a route, without misusing the techno-social factors of this period as being mechanical or vitalistic view.

Then, let us think about the metaphor within the origin of the term cybernetics. Are you steering along the route that is controlled with fineness, consistently placing and coordinating technological objects? Or, are you facing a map drawn by the enormous political, economic conflict and hallucination from worship of technology? Such a map might have so many holes that you may navigate directly from the front to the back; it might be a practical map that reveals a better view of the present age of technology fanaticism. But what you have to do now is to unfold an empty map for steering. This map does not indicate any direction. You are going to open this empty map in order to talk about feedback, self-control, and autonomous control in art.

Let us cope with the topic more in detail: Where should you set out on this empty map? Before thinking about feedback of human and machine, you need again to talk about the problems of relation between face and face, or interface, as the problem of “junction,” in order to look into how the feedback is structured. In doing so you can look into how messages create some influence with specific structures to make a “junction” with different boundaries. This is also a process of technological development; this is still a valid attempt in that many of the current technological discourses are based on relation between human and machine and attempt to make a junction between the two.

It is hard to deny that the most buzzed-out expression on the question of how the interface is constructed has been “seamless transition” for a few years. For the seamless transition, your facial expressions, manual activities, gazes, gestures, and voices are “cognized,” collected, analyzed, and re-feedbacked. The seamless transition, creating an interesting boundary of fusion of “the born” and “the made” for a smoother junction, is being reformed to be new novel-material and biological experiments. However, the process of the junction is not a matter of smoothly joining boundaries of human and machine. Rather, the process is a matter of making boundaries against all the differences that cross the social composition and of requiring consistent re-coordination for them. Then you may ask a question: Why does the destructive transformation, which had always appeared in the era of every technological revolution as so-called “satanic mills,” reveal (or hide) the present period by emphasizing seamless transition or the paradigm of “smart”?

Within this “seamless transition” as the commands of the mainstream interface of this era, artists grab what is percolated into themselves and what rises vertically and give them interesting disharmony. It seems to obey rules of standard but slips away to appropriate them; it reveals unspoken views and actively place intervention of audience within the circuit of feedback. Those views are not to design a boundary plane that merely connect between this and that world but to play a role of revealing and re-requiring some types of grammar, rules, or different information systems. In other words, it exposes “interference interface,” which re-evokes the role of interface as the “face” confronting with another face in the middle (i.e., “inter”).

In her work Sum, Bae In-Suk places a multi-touch, an interface as familiar as gravity to you, on the center. However, this multi-touch is far from standardized ones. For those who are accustomed to a single multi-touch that perceives coordinates, the multi-touch of this machine is practically a totally different interface device in that it only communicates only when you use your both hands simultaneously. The audience moves their fingers and thumbs, tactually memorizing only significant finger movements unintentionally (or under autonomous control). Suddenly, the movements reach a state of meaningful unity; hidden sound is revealed as the noise is diminished. This device is a smooth variation of multi-touch interface, interestingly seizing the history of information communication that has been developed for the purpose of delivering clear messages by consistently removing noises.

Diana Band’s Phones in Hands: Square Practice invites the audience into an open network as an active player. The work intactly receives senses of the audience who are habituated to smartphones and webpages as the most standardized interfaces in the digital era, but the audience in this network experiences the degree of freedom different from that of the standardized interfaces. The audience synchronizes purposes different from previous ones with each other, and, during the process, finds out a possibility that you do not have to pretend to be open within a controlled network and you can serve as an open circuit.

Protoroom put the interface into pixels, the origin of digital images. Passing the era of high resolution “Deep 8K,” you are faced with planes whose resolution is higher than that of reality, while pixels are going under, becoming the invisible “atoms” of the digital world. The metapixel feedback camera gives life to these invisible pixels, positioning each pixel on an interface that can communicate with the computer. Each pixel moves according to feedback algorithms, all of which are combined into new images that provide the audience with a moment of poetic computation.

Hwang Ju-Sun is interested in how the audience experiences defamilarization and forms meaning by themselves. With the belief that human beings will “form meaning” by any means if they are autonomous, his/her work approaches the audience in a manner close to “shaking” rather than deliberately intervenes into the audience. Hwang intactly borrows the dynamics of connection in the modern interface technology but puts it on the indexes that are publicized and feedbacked in the name of technology or science so that the audience forms questions and meanings. In Mind? = Mind!, the artist focuses on electrocorticography, one of the several modern recognition technologies having immature seams. Despite its ambiguous feedback, the electrocorticography forms a moment of “scientific” trust due to quantification delivered with determination and brevity. Hwang asks how you will accept this “technical consensus” that becomes a widely-used interface in spite of its ambiguity.

Unmake Lab withdraws the fantasy of audience intervention, observing and discussing the seams gaping when a city is changed. The duplicated cities represented by “Guro Industrial Complex” and “Guro Digital Complex“ were geographically one city, but became cities without seams. The two cities do not remember the history of each other due to rapid re-development caused by changes in industrial paradigm, but their labor environments are similar and constantly repeated. Collecting the histories, truths, and rumors of the two cities through research and interviews, Unmake Lab argues how the two seemingly seamless cities maintain labor environment that goes back to itself identically by national programming. Then, it materializes what it argues as a device that generates sounds when salt water—a type of medium having both metaphor of labor and conductivity—randomly touches the screen, raising a question toward the national propaganda for technology politics that always promises a “bright future.”

These artists attempted their approaches toward interference interface again as the “practice” in which the audience participate in the technical media workshop.

Bae In-Suk provides the participants with motors, wings, and a pile of cords that controls the motors and the wings in the identical way. The participants make devices with them according to the given manual without specific intervention or autonomy. When they operate the completed devices with the motors and the wings, the devices show seemingly unified but subtly different movements though they were made under the same conditions. This allows you to re-consider the illusion of complete control.

Opening the ways the Meta Pixel Camera works, Protoroom allows the participants to directly talk to the pixels in a way that the participants give the pixels algorithm they want. In this concise but unfamiliar communication, the participants are required to differently talk to each pixel that consists of the digital images, carrying out different communicative ways with computers through this not-widely-used interface device.

Diana Band selects Wi-Fi as another network tool. The numerous Wi-Fi signals and names on digital devices surround you as if they were others, who pass you by and whom you do not know. The participants take it the Wi-Fi marks are the platform for communicating individual voices and post their messages there. Given that these are the messages sent to each other by the subjects who exist only in a limited space, the messages are able to embody voices that are unexposed by the Wi-Fi marks floating meaninglessly.

Unmake Lab has been consistently raised questions on technology-in-use and innovative technology based on its concern in history that has been changed by technology. In this context again, Unmake Lab points out the fundamental departure where technology is “based on natural phenomena” when you note the way radios as an old medium works. The participants make transmitters and try to receive the sounds they are transmitting, facing immense noises other than those of the smooth reception. Then, they re-consider how info-communications has dealt with the mechanisms of radio waves as natural phenomena, noises, and transmission & reception to develop technology.

As stated above, these artists in their works and the technical media workshop focus on communication with the empty others. Or, in the numerous self-recognition technologies and interfaces that objectify subjects, they present not the drive for seamless connection of the current technology fantasies but the interference that asks what the boundary is and what the interface itself is. This is how they engrave specific senses on the modern interfaces that are smoothly invasive without being conscious. Through the process, human and machine are able to relate to each other across several different boundaries, which may serve as what artistic activities can re-invent in the era of technology.

Looking back, cybernetics identifies both human and machine with devices with self-controlled homeostasis that can be feedbacked because it puts emphasis on the fact that the individual entities are not segmented but in relations. Then, cybernetics is able to coordinate the feedback loops of several problems in the ecosystems of individuals, society, and the Earth, consistently making questions. And the technological activities for re-coordinating such relations on imagination of junction and interference are new artistic activities, labor activities, and restorative activities crossing the circuits constructed by the power and control system at the same time. Furthermore, it they serve as activities that constantly re-coordinate the understanding of life, ecology, artificiality, politics, and capital by evoking the origin—technology based on natural phenom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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